국가가 배상하고, 공무원에게 돈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국가가 불법 수사나 고문을 자행한 사건에서 피해자가 승소하면 정부는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이 불법을 실제로 저지른 공무원에게 일부 책임을 물어야 한다"며 구상권을 행사하곤 합니다. 구상권이란 국가가 대신 물어준 돈을 실제 가해 공무원에게 다시 청구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이번 사건에서 정부는 보안사 고문 기술자로 알려진 고병천 전 수사관에게 구상금을 청구했습니다. 하지만 1심부터 대법원까지 모두 패소했고, 그 이유는 "공무원의 직무 안정성 보장을 위해 구상권 행사는 엄격히 제한되어야 한다"는 기존 판례 때문이었습니다.
법원의 판단, "적극 주도했는가"가 핵심
대법원은 오래전부터 원칙을 세워왔습니다. 단순히 가담했다고 해서 구상권을 인정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주도했는가"가 기준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번 고병천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결국 법원은 "구상권 행사를 허용할 정도의 주도적 행위는 아니다"라며 정부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는 배상받았지만, 책임은 공중에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피해자는 국가배상 소송에서 승소하여 수억 원의 배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국가가 그 돈을 실제 가해자에게 돌려받으려 하자 법원이 막아버린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피해자 보상은 국가 재정으로만 이뤄지고, 가해 공무원 개인은 책임을 지지 않게 되는 구조가 고착화됩니다.
이는 피해자 입장에서는 '국가가 대신 책임졌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정의 실현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큽니다. 고문을 직접 한 사람이 법적으로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면 과연 법의 공정성에 부합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상급자를 함께 제소하지 않았을까
법조계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의 패소 원인을 '피고 선정'에서 찾습니다. 당시 보안사령부의 지휘부, 즉 고병천의 상관들까지 함께 소송을 걸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실제로 과거 '수지김 사건'에서는 정부가 장세동 전 안기부장을 포함한 고위 간부 5명을 상대로 구상권을 청구했고, 법원은 "최종 결정권자에게 책임이 있다"며 일부 책임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고병천 사건에서도 상관이 아닌 중간 간부 한 명만 피고로 삼았기에 법원이 "주도성이 없다"는 이유로 쉽게 손을 들어줄 수 있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국가폭력 사건에 일반 판례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문제의 본질은 여기에 있습니다. 국가폭력 사건은 일반 민사소송과 다릅니다. 피해자가 오랜 세월 심리적 억압 상태에 있었고, 증거 확보도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법원은 여전히 "공무원 보호"라는 기존 판례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반인륜 범죄에까지 공무원 보호 논리를 적용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결국 이런 판례가 이어지면 앞으로도 많은 과거사 사건에서 구상권 회수는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왜 패소했는가?
1. '적극 주도'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대법원은 오래전부터 국가의 구상권 행사에 대해 매우 제한적인 태도를 보여 왔습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래서 법원은 "불법 행위를 적극 주도한 경우"에만 구상권을 인정합니다.
이번 사건에서 고병천은 준위 계급으로 결재권도 없었고, 상부 지시를 받는 위치였습니다. 즉, 고문에 직접 가담한 정황은 있어도 사건 전체를 지휘하거나 주도한 증거는 부족했습니다. 법원은 이 점을 들어 "구상권 행사를 허용할 만큼 주도성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2. '재심 지연의 직접 원인' 입증 실패
국가가 주장한 논리는 이랬습니다.
"고문 수사와 위증 때문에 피해자들의 재심이 늦어졌고, 그 결과 소멸시효 항변이 배척되어 국가가 뒤늦게 거액을 배상했다. 따라서 그 책임을 고문 가해자인 고병천이 져야 한다."
하지만 항소심과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원인 행위는 있었지만 "그 때문에 국가가 소멸시효 항변에 실패했다"는 연결 고리를 입증하지 못한 겁니다.
3. 피고 선정의 한계 – 상급자를 제소하지 않았다
실무적으로는 이 부분이 가장 큰 전략적 실패로 지적됩니다.
고병천은 현장에서 고문에 가담했지만 최종 결재권자나 지휘권자가 아니었습니다. 반면 상급 지휘부, 예컨대 보안사령관이나 대공처장까지 함께 제소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 있습니다. 지휘·감독권자가 사건 은폐나 조직적 불법 수사에 개입한 정황은 비교적 입증이 쉽고, 법원도 그 책임을 인정할 여지가 더 컸을 것입니다.
실제 2003년 '수지김 사건'에서는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 고위 간부들에게 구상금 책임이 인정된 전례가 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는 중간 간부 한 명에게만 소송을 집중했기에 법원이 "개인적 책임을 묻기엔 부족하다"고 선을 그은 것입니다.
4. 법원의 태도 – 국가폭력 사건에도 일반 공무원 면책 논리 적용
국가폭력 사건은 본질적으로 반인륜적 범죄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이번에도 기존의 일반 판례, 즉 "공무원 직무 안정 보장" 논리를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피해자 변호인단은 "국가폭력 사건만큼은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법리는 국가 책임을 피해자에게 보상하는 선에서 멈추었고, 가해자 개인 책임까지 확장되지는 않았습니다.
5. 정리 – 왜 패소했는가
1. 고병천이 '적극적으로 주도했다'는 증거 부족
2. 불법 수사·위증과 국가의 소멸시효 배척 사이 인과관계 입증 실패
3. 상급 지휘부를 함께 소송에 포함하지 않은 전략적 한계
4. 국가폭력 사건에도 일반 공무원 면책 판례를 그대로 적용한 법원의 태도
이 네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정부가 1심부터 대법원까지 패소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 사건은 피해자 보상과 가해자 책임 사이의 간극을 보여줍니다. 국가폭력은 국가가 대신 배상한다고 끝낼 문제가 아닙니다. 가해 공무원에게도 일정한 책임을 물어야 정의가 완성됩니다. 하지만 법원은 여전히 "적극 주도 여부"라는 협소한 기준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입법적 보완이나 새로운 판례 변화가 없다면 국가폭력 피해 배상 구조는 여전히 국가만 책임지고 가해자는 비켜가는 불완전한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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