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가 지난 9월 서산개척단 사건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포기했습니다. 이로써 '대한청소년개척단'이라는 이름 아래 강제 동원된 시민들에 대한 위자료 청구소송은 1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습니다. 서산의 폐염전과 황무지에서 강제노역을 해야 했던 이들은 1961년부터 1966년까지 약 5년간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피해자와 유족 112명이 국가의 책임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판결의 의미는 단지 한 사건의 마침표가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인 우리 사회의 '과거사 정리'라는 과제를 다시금 묻는 물음표에 가깝습니다.
진실은 밝혀졌지만, 피해 회복은 여전히 멀다
서산개척단 사건은 1960년대의 일이었습니다. 주민등록제도조차 정착되지 않았던 시기였기에 피해자 대부분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유족들도 당시의 기록을 온전히 남기기 어려웠습니다. 피해자들의 입·퇴소 기간조차 불분명했기 때문에 소송 과정에서는 각 초등학교, 시청, 교육지원청 등으로부터 수차례 사실조회가 필요했습니다. 피해자들이 직접 학교를 찾아가 생활기록부를 발급받는 일도 많았습니다.
만약 초기에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보다 구체적인 사실조사를 진행했다면 피해자들의 권리구제는 더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진실을 밝혀내는 것 자체가 피해자에게는 또 한 번의 고통이었고, 국가는 그 시간의 무게만큼 더딘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진실규명결정 이후에도 소송을 해야 하는 현실
이번 서산개척단 판결은 법무부가 항소를 포기했기에 확정되었지만, 피해자들이 스스로 소송을 제기해야만 국가배상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위)의 진실규명결정이 있었다 해도, 국가가 자발적으로 배상한 적은 없었습니다.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삼청교육대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과거사위가 진실을 인정했지만 피해자들은 여전히 법정에서 싸워야 했고, 일부는 '화해권고결정'으로 사건이 마무리되기도 했습니다.
진실규명결정이 국가의 불법행위를 인정한 것이라면, 피해자에게 다시 소송을 제기하라는 것은 또 다른 고통의 연장이 아닐까요. 이미 국가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했는데 그 배상마저 "청구가 있어야만" 이루어진다는 것은, 과거사 반성의 진정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국가의 모순
과거사 사건에서 국가가 빠지지 않고 내세우는 주장이 있습니다. 바로 소멸시효 완성입니다.
수십 년 전의 일이라 법적 시효가 지났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과거사위의 진실규명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은, 그동안 피해자들이 국가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해 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국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이제 와서 너무 오래됐으니 책임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중적입니다.
몇 년 전 한 대법관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국가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스스로 소멸시효를 주장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 이번 법무부의 항소 포기 결정은 그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완전한 해답은 아닙니다.
배상의 절차조차 피해자에게는 또 하나의 벽
판결이 확정되었더라도 실제 배상금 지급 절차는 여전히 복잡합니다. 삼청교육대 사건의 경우 국방부가 절차를 안내했지만, 서산개척단 사건은 서울고등검찰청 소송사무과가 담당했습니다. 같은 과거사 사건임에도 청구 서류, 안내 방식, 담당 기관이 모두 달랐던 것입니다.
고령의 피해자들이 시행규칙에 맞지 않는 복잡한 양식을 직접 찾아 작성하고, 담당자와 일일이 통화해 약속을 잡아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현실은 결코 '국가의 사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미 판결문을 수령한 국가가 다시 피해자에게 '판결문 정본을 두 부씩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절차는 행정의 형식만 남은 모습입니다.
진정한 사과와 배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서산개척단 피해자 대표 정영철 위원장은 여러 다큐멘터리에서 같은 말을 반복해왔습니다.
"우리는 돈보다 국가의 사과를 받고 싶다."
그가 바란 것은 거창한 보상이 아니라 국가가 저지른 폭력에 대한 인정과 책임이었습니다. 하지만 사과는 판결문 속 문장으로만 남았습니다.
국가가 진실을 규명했다면 이제는 그 진실을 제도적으로 치유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피해자가 소송을 제기해야만 배상받을 수 있는 구조를 바꾸고, 판결금 지급 절차를 간소화하며, 과거사 사건마다 다르게 운영되는 행정체계를 통일해야 합니다.
서산개척단 사건은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한 기록이자 현재의 책임을 묻는 거울입니다.
진실이 밝혀졌다면 이제는 국가가 먼저 사죄하고 배상해야 합니다.
시효를 핑계로 책임을 피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또 다른 절차를 강요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과거사 정리의 완성입니다.
과거의 잘못은 '끝난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떤 태도로 미래를 세워 나갈지를 보여주는 시험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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