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날짜를 잡아 두고 임대인에게서 문자를 받습니다. 도배 180만 원, 장판 90만 원, 입주청소 80만 원. 합쳐서 350만 원을 보증금에서 빼고 보내겠다는 내용인데요. 5년을 사는 동안 벽에 못 몇 개 박은 것 말고는 한 일이 없는데 금액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이 공제가 정당한지는 그 낡음이 '정상적으로 살기만 해도 생기는 변화'인지, '임차인의 부주의로 생긴 훼손'인지에서 갈립니다.
통상손모와 과실훼손의 경계
임차인이 원상회복 의무를 지는 범위는 자신의 잘못으로 생긴 훼손까지입니다. 민법 제654조는 제615조를 임대차에 준용해 임차인에게 목적물을 원상으로 회복해 반환할 의무를 지우고, 제374조는 인도할 때까지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 보존하도록 정합니다. 이 두 조문이 임차인 부담의 출발점입니다.
반대편에는 민법 제623조가 있습니다. 임대인은 계약이 이어지는 동안 목적물을 사용·수익에 필요한 상태로 유지할 의무를 집니다. 집이 세월에 따라 낡는 부분을 관리할 사람은 임대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햇빛에 바랜 벽지, 가구 다리가 눌러 놓은 장판 자국, 붙박이장 안쪽의 변색, 액자를 걸었던 못자국 정도는 통상의 사용으로 생기는 손모로 봅니다. 반면 반려동물이 긁어 파인 마루, 실내 흡연으로 누렇게 착색되고 냄새가 밴 벽지, 벽걸이TV를 달려고 뚫은 큰 타공, 누수를 알고도 몇 달간 방치해 번진 곰팡이는 성격이 다릅니다.
같은 곰팡이라도 결론은 갈립니다. 외벽 결로나 배관 누수처럼 건물 자체의 문제에서 비롯됐다면 수선 책임은 임대인에게 있고, 환기 한 번 하지 않아 생긴 것이라면 임차인 쪽으로 기웁니다. 곰팡이가 생겼다는 사실이 아니라 원인이 기준입니다.
차임에 이미 녹아 있는 비용
통상손모를 임차인이 물지 않는 이유는 그 비용을 이미 냈기 때문입니다. 임대차는 목적물이 닳는 것을 전제로 하는 계약이고, 그 감가에 대한 대가가 차임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법원이 취해 온 판단의 기본 틀입니다. 통상손모까지 원상회복 대상으로 보면 임차인은 같은 값을 두 번 내는 셈이 됩니다.
그러니 오래 살았다는 사실 자체는 임차인에게 불리한 사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거주 기간이 길수록 통상손모로 인정되는 범위는 넓어집니다.
1년 살고 나가면서 벽지 전체가 변색됐다면 원인을 따져 볼 여지가 있지만, 5년을 산 집의 도배와 장판이 새것 같지 않은 건 설명이 필요한 일이 아닙니다.
원상복구 특약의 사정거리
계약서에 "임차인은 원상복구 후 명도한다"는 한 줄이 있으면 끝났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 문구만으로 통상손모까지 임차인이 떠안기로 합의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법원은 통상손모에 해당하는 부분을 임차인 부담으로 돌리려면, 그 대상과 범위가 계약서에 명확히 드러나거나 당사자 사이에 분명히 합의되었어야 한다고 봅니다. 포괄적인 원상복구 문구는 임차인의 귀책으로 생긴 훼손을 복구하라는 확인 정도로 읽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특약이 "퇴거 시 도배와 장판은 임차인 비용으로 새로 시공한다"처럼 항목과 부담 주체를 콕 집어 적혀 있고 거기에 서명했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이 경우에는 특약이 우선하고, 위 설명은 그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입주 당시 상태'와 '새것 상태'가 다르다는 점도 짚어 둘 만합니다. 입주할 때 이미 5년 된 벽지였다면, 원상회복의 기준은 5년 된 벽지이지 갓 시공한 벽지가 아닙니다.
공제를 증명할 사람
보증금에서 무언가를 빼려면, 뺄 이유와 액수를 증명할 사람은 임대인입니다. 보증금은 임대인이 가지고 있지만, 그 돈에서 공제할 채권이 실제로 생겼는지는 공제를 주장하는 쪽이 밝혀야 한다는 것이 확립된 법리입니다.
지금 입주 당시 사진을 찾느라 휴대폰 앨범을 몇 년치 거슬러 올라가고 계실 텐데요. 사진이 있으면 다툼이 훨씬 빨리 정리되는 건 맞습니다. 다만 사진이 없다고 해서 임대인의 주장이 그대로 인정되는 구조는 아닙니다.
이 단계에서 임대인은 보통 인테리어 업체 견적서 한 장을 근거로 내밉니다. 견적서는 앞으로 이만큼 들 수 있다는 예상일 뿐, 실제로 그 돈을 썼다는 증명이 아닙니다.
실제 시공을 했는지, 세금계산서나 이체 내역이 있는지, 그 금액이 같은 공사의 통상 시세와 맞는지가 따져집니다. 공사를 하지도 않고 새 임차인을 들인 뒤 공제액만 챙기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새 자재값과 잔존가치
임차인의 잘못이 인정되더라도, 부담액은 새 자재 값 전액이 아닙니다. 손해배상은 훼손 직전 그 물건이 가지고 있던 가치를 기준으로 계산하기 때문입니다.
강아지가 마루를 긁어 보수 견적이 120만 원 나왔다고 해 봅니다. 그 마루가 통상 10년쯤 쓰는 자재이고 훼손 시점에 이미 6년이 지났다면, 남은 가치는 대략 40% 수준입니다. 이 비율을 반영하면 임차인 부담은 50만 원 안팎으로 내려갑니다.
자재별 내용연수를 법으로 정해 둔 표가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경과 연수를 반영해 감액하는 계산 방식 자체는 실무에서 널리 쓰이고, 협의 단계에서 꺼내 놓는 것만으로도 금액이 크게 움직입니다.
돌려받는 순서와 이자
보증금 반환과 집을 비워 주는 일은 동시이행 관계입니다. 짐을 완전히 빼고 열쇠를 넘기기 전까지는 임대인이 늦게 준 책임을 지지 않으니, 버티는 것이 유리한 국면은 아닙니다.
이자는 인도를 마친 다음부터 붙습니다. 소를 제기하면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 제3조 제1항에 따라 소장 부본이 송달된 다음 날부터 연 12%가 적용되고, 그 이전 구간은 민법상 법정이율 연 5%입니다.
오늘 받아 둘 한 줄
오늘 하실 일은 임대인에게 공제 항목과 금액을 문자로 남겨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전화로만 오간 숫자는 시간이 지나면 조용히 늘어나지만, 문장으로 남은 항목은 그 자체로 임대인이 주장할 수 있는 범위를 묶어 둡니다. 그 한 장이 협의의 출발선이 되고, 따로 준비한 자료가 없어도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