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에서 면책결정문을 받으면 그동안 쌓였던 빚이 한꺼번에 정리됩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생활비가 모자라 다시 카드를 쓰거나 지인에게 돈을 빌린 뒤, 이것도 지난번 면책에 묻어가는지 궁금해지죠. 면책의 효력은 파산선고 전의 원인으로 생긴 채권에만 미치고, 그 뒤에 생긴 빚은 그대로 남습니다. 여기서 갈리는 기준일이 생각보다 앞에 있다는 점이 오해의 출발점입니다.
기준선은 면책결정일이 아니라 파산선고일
많은 분이 면책결정을 받은 날을 경계선으로 생각합니다. 법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 제423조는 파산선고 전의 원인으로 생긴 재산상의 청구권을 파산채권으로 정하고, 같은 법 제566조는 면책을 받은 채무자가 파산채권자에 대한 채무 전부에 관하여 책임을 면한다고 정합니다. 면책이라는 그물에 걸리는 대상 자체가 파산선고를 기준으로 정해지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면책 범위를 따질 때 먼저 확인할 날짜는 파산선고일입니다. 결정문 상단에 선고일이 적혀 있고, 면책결정은 그보다 몇 달 뒤 별도의 결정문으로 나옵니다.
지금 면책결정문을 꺼내 날짜를 확인하고 계신다면, 결정일 아래쪽이 아니라 그보다 앞선 파산선고일을 보셔야 합니다. 두 날짜 사이에 생긴 빚의 운명이 여기서 정해지거든요.
선고와 면책 사이의 공백
재산이 거의 없어 동시폐지로 진행되는 개인파산에서, 파산선고부터 면책결정까지는 통상 몇 달이 걸립니다. 그사이 채권자 의견청취 기간이 지나고 면책심문이나 서면 확인이 이루어집니다. 이 기간에 새로 진 빚은 파산채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3월에 파산선고를 받고 9월에 면책결정이 확정된 분이 5월에 급하게 300만 원을 빌렸다면, 그 300만 원은 면책과 무관하게 남습니다. 절차가 진행 중이니 함께 정리될 것이라 짐작하기 쉽지만, 근거가 되는 조문의 문언이 파산선고 시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원인'이 언제 생겼는지
날짜만큼 중요한 것이 원인의 시점입니다. 돈을 실제로 갚으라는 청구가 뒤늦게 왔더라도, 그 청구의 바탕이 된 법률관계가 파산선고 전에 만들어졌다면 파산채권으로 봅니다.
보증이 대표적입니다. 파산선고 전에 친구의 대출에 보증을 섰고 선고 후에 친구가 연체해 보증채무 이행을 청구받았다면, 보증계약이라는 원인은 선고 전에 이미 존재했습니다. 반대로 면책을 받은 뒤 새로 선 보증은 아무리 사정이 딱했어도 새 채무입니다. 할부나 리스도 마찬가지여서, 선고 전에 체결한 계약의 잔여 할부금은 변제기가 아직 오지 않았더라도 파산채권에 들어갑니다.
다만 계속적으로 이용하는 계약에서 선고 후에 사용한 부분은 이 설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같은 통신사 요금이라도 선고 전 미납분은 면책되고, 선고 후에도 회선을 유지하며 쓴 요금은 새로 발생한 채무로 남습니다.
파산선고 전 빚인데도 남는 것
시점이 맞아도 면책되지 않는 채권이 따로 있습니다. 제566조 단서는 비면책채권을 열거하는데, 조세와 벌금·과료·추징금, 고의로 가한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 중대한 과실로 타인의 생명이나 신체를 침해한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 근로자의 임금·퇴직금·재해보상금, 양육비와 부양료 등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 항목들은 면책결정문에 따로 적히지 않습니다. 결정문에는 면책한다는 주문만 있으므로, 세금 체납분이나 양육비가 남아 있는 줄 모르고 지내다 압류 통지를 받고서야 알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채권자 목록에서 빠진 채권
같은 조 단서는 채무자가 악의로 채권자목록에 기재하지 않은 청구권도 면책에서 제외하되, 채권자가 파산선고 사실을 알고 있었던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정합니다. 핵심은 '악의'입니다. 존재를 알면서 일부러 빠뜨린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고, 오래되어 잊었거나 서류를 확보하지 못해 누락한 정도는 면책의 효력이 미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실무의 태도입니다.
목록에서 빠진 채권을 가진 대부업체나 채권매입 회사는 면책 이후에도 지급명령을 신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급명령 정본을 받은 날부터 2주 안에 이의신청을 하면 소송으로 넘어가고, 그 절차에서 면책의 효력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미 확정된 뒤라면 청구이의의 소라는 별도의 방법을 거쳐야 해서 품이 훨씬 많이 듭니다.
이의 기간을 놓치는 일이 실제로 적지 않습니다.
새 빚으로 다시 파산을 생각할 때의 7년
면책 후 생긴 빚이 감당할 수 없는 규모라면 다시 파산을 신청할 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면책 단계입니다. 제564조는 면책을 받은 후 7년이 경과하지 않은 때를 면책불허가 사유로 정하고, 개인회생절차에 따른 면책을 받은 경우에는 그 확정일부터 5년을 기준으로 합니다. 앞선 면책결정 확정일로부터 7년이 지났는지가 두 번째 면책의 첫 관문입니다.
그렇다고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은 아닙니다. 법원은 면책불허가 사유가 있더라도 파산에 이르게 된 경위와 그 밖의 사정을 참작해 재량으로 면책을 허가할 수 있습니다. 다시 빚을 지게 된 사정이 병이나 실직처럼 불가피했는지, 아니면 절차를 가볍게 여긴 결과인지가 이 판단에서 무게를 갖습니다. 기간이 남았다면 개인회생으로 방향을 바꾸는 선택지도 함께 검토하게 됩니다.
지금 갚으라는 독촉을 받고 계신 그 빚이, 파산선고일보다 앞서 생긴 것인지 뒤에 생긴 것인지를 먼저 갈라 보시기 바랍니다. 앞선 것이라면 다음은 세금·양육비·고의 불법행위처럼 단서에 열거된 항목인지, 그리고 채권자목록에 들어가 있었는지를 확인할 차례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에 답이 정해지면 대응 방향도 거의 정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