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다가 수첩에서 지인 이름과 '3,000만 원'이라는 메모를 찾는 일이 있습니다. 그 돈은 자녀가 청구할 수 있습니다. 상속인은 아버지의 재산에 관한 권리와 의무를 이어받는데(민법 제1005조), 빌려준 돈을 돌려받을 권리도 여기에 들어갑니다.
아버지가 지인에게 빌려준 돈이 있는데, 자식인 제가 대신 받을 수 있나요?
실제로 얼마를 받느냐는 네 가지에 따라 갈립니다. 상속을 받을지 정했는지, 누구 몫인지, 빌려준 사실이 증명되는지, 시효가 남았는지입니다.
Q. 아버지가 남긴 빚이 있을지도 몰라요
빚이 있을 수 있다면 돈을 받기 전에 상속 방식부터 정해야 합니다. 상속인은 상속이 시작된 것을 안 날부터 3개월 안에 단순승인, 한정승인, 상속포기 중 하나를 고릅니다(민법 제1019조 제1항). 한정승인은 물려받은 재산 한도에서만 아버지 빚을 갚는 방식입니다. 이 기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속인은 단순승인한 것으로 봅니다(민법 제1026조 제2호).
함정은 돈을 받는 행위에 있습니다. 상속재산을 처분해도 단순승인한 것이 되는데(민법 제1026조 제1호), 법원은 아버지 채권을 받아 내는 것도 처분에 해당한다고 판단합니다. 그 뒤 큰 빚이 드러나면 상속포기는 할 수 없습니다. 빚이 더 많다는 사실을 중대한 과실 없이 몰랐다고 인정받아야 한정승인의 길이 남습니다(민법 제1019조 제3항).
받는 순간이 곧 선택이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빚을 다 확인하지 못했고 시효가 넉넉하다면, 돈을 받는 일은 상속 방식을 정한 뒤로 미루는 편이 낫습니다. 아버지 명의의 대출·카드·세금은 정부24나 주민센터의 안심상속 원스톱 서비스로 한 번에 조회됩니다. 법은 상속재산을 지키는 보존행위는 처분으로 보지 않습니다(민법 제1026조 제1호 단서).
아버지 채권을 받아 내면 상속을 그대로 받겠다는 단순승인이 됩니다. 빚 확인이 먼저입니다.
Q. 엄마랑 누나 몫까지 제가 받아도 돼요?
혼자서는 자기 상속분만큼만 청구할 수 있습니다. 법원은 돈 받을 권리처럼 나눌 수 있는 채권은 상속과 동시에 법정상속분대로 나뉘어 넘어간다고 봅니다. 상속인끼리 따로 협의하지 않아도 각자 몫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빌려준 돈이 7,000만 원이고 상속인이 어머니와 자녀 둘이라고 가정합니다. 배우자는 자녀 몫에 5할을 더 받으므로(민법 제1009조 제2항) 비율은 1.5 대 1 대 1, 합계 3.5입니다. 7,000만 원을 3.5로 나눈 2,000만 원이 한 몫이니, 어머니는 3,000만 원, 자녀는 각 2,000만 원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전액을 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른 상속인이 자기 몫을 넘겨주는 채권양도입니다. 이때는 넘기는 사람이 채무자에게 통지하거나 채무자가 승낙해야 그 양도를 채무자에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450조 제1항). 넘겨받은 사람이 혼자 보낸 통지는 효력이 없는데, 실제로 자주 나오는 실수입니다.
빌려 간 사람이 "상속인이 다 와야 갚겠다"고 버티는 경우도 있는데요. 몫이 이미 나뉘어 있으니 내 몫을 청구하는 데 다른 상속인의 동의는 필요 없습니다. 상속인이라는 점은 가족관계증명서 같은 서류로 보여 주면 됩니다.
Q. 차용증은 없고 통장 기록만 있어요
송금 기록만으로 빌려준 돈이라는 점이 곧바로 인정되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이 돈은 받았지만 빌린 게 아니라고 다투면, 법원은 빌려줬다는 사실을 돈을 달라는 쪽이 증명하게 합니다. 돈이 오간 이유는 증여일 수도, 다른 빚을 갚은 것일 수도 있거든요.
차용증이 없다고 끝난 이야기는 아닙니다.
빌려 간 사람이 매달 같은 금액을 아버지 계좌로 보낸 내역은 이자로 읽혀 대여를 뒷받침합니다. "다음 달까지 갚겠다"는 문자나 카카오톡은 차용증에 가까운 힘을 가집니다. 아버지가 혼자 적은 수첩은 그 자체로는 약하지만 송금 기록과 맞아떨어지면 힘이 붙습니다.
지금 아버지 휴대폰에서 그 사람과의 대화를 거슬러 올라가 보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 휴대폰은 초기화하거나 해지하지 말고 그대로 두십시오. 메시지는 한 번 지워지면 되살리기 어렵습니다.
차용증이 없어도, 이자처럼 들어온 송금 기록과 '갚겠다'는 메시지가 빌려준 돈을 증명합니다.
증거가 모자라면 지금 만들 수도 있습니다. 상속인이 상대방과 통화하며 "아버님께 빌린 돈"이라는 말을 듣고 녹음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이 참여한 대화를 녹음하는 것은 불법 감청이 아닙니다. 그 한마디는 증거이면서, 시효를 새로 시작시키는 채무 승인이 되기도 합니다.
Q. 빌려준 지 벌써 9년이 넘었대요
개인 사이에 빌려준 돈은 10년 동안 청구하지 않으면 시효로 사라집니다(민법 제162조 제1항). 일반 채권의 시효를 정한 조문이라 지인 간 대여금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기간은 갚기로 한 날이 있으면 그날부터, 없으면 빌려준 때부터 세는 것이 원칙입니다.
돈이 장사와 얽혀 있으면 사정이 다릅니다. 아버지나 빌려 간 사람이 상인이고 그 영업과 관련해 오간 돈이면 상행위로 생긴 채권이 되어 시효가 5년입니다(상법 제64조). 같은 금액이라도 돈의 쓰임새에 따라 기한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시효가 새로 시작되지는 않고, 생전에 흐른 기간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다만 상속재산에 속한 권리는 상속인이 확정된 때부터 6개월 안에는 시효가 완성되지 않습니다(민법 제181조). 만료 직전에 돌아가셨다면 이 6개월이 남은 여유입니다.
시효를 멈추는 방법은 소송, 가압류, 상대방의 채무 승인입니다(민법 제168조). 중단되면 그때까지 흐른 기간은 지워지고 처음부터 다시 셉니다(민법 제178조 제1항). 내용증명 독촉은 최고에 그쳐, 6개월 안에 소송이나 가압류로 이어 가지 않으면 중단 효력이 없습니다(민법 제174조).
이미 10년이 넘었다면 포기해야 할까요. 그렇게 정하기 전에 아버지 통장에서 상대방 돈이 마지막으로 들어온 날을 찾아보십시오. 일부라도 갚았다면 빚을 인정한 것이어서 그날부터 시효가 다시 진행합니다. 시효가 끝난 뒤에 갚은 경우에도 법원은 시효의 이익을 포기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Q. 그 사람은 아버지랑 다 정리했다고 해요
상대방의 반응은 대개 이미 갚았다, 그냥 받은 돈이다, 아버지가 안 받기로 했다 중 하나입니다. 대여 사실과 달리, 갚았다거나 빚을 면제받았다는 사실은 그렇게 주장하는 상대방이 증명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반박할 수 없다는 걸 상대방도 알죠. 그래도 말만으로 변제가 인정되지는 않습니다.
상대방이 다투면 절차는 보통 이렇게 흘러갑니다.
1. 내용증명: 보낸 뒤 6개월 안에 다음 절차로 이어 가야 시효를 멈추는 효과가 남습니다.
2. 지급명령: 서류로만 진행하고, 상대방이 송달받은 날부터 2주 안에 이의하지 않으면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생깁니다. 다툼이 없으면 한두 달 안에 끝나기도 합니다.
3. 민사소송은 이의가 나오거나 처음부터 다툼이 뻔할 때 택하며, 1심에 통상 반년에서 1년 안팎이 걸립니다.
흔한 실수는 다툼이 뻔한데 지급명령부터 내는 것입니다. 이의서 한 장이면 소송으로 넘어가 그만큼 시간만 씁니다. 재산을 빼돌릴 낌새가 보이면 소송 전에 가압류부터 검토합니다. 가압류는 그 자체로 시효도 멈춥니다.
Q. 판결만 받으면 돈은 바로 들어오죠?
판결이 나와도 상대방이 갚지 않으면 강제집행을 따로 해야 합니다. 예금, 급여, 부동산이 대상이며 급여는 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만 압류됩니다. 상대방 재산을 모르면 재산명시를 신청해 법원이 재산목록을 내게 할 수 있습니다(민사집행법 제61조).
판결의 효력은 소송을 낸 사람의 몫에만 미칩니다. 시효 중단도 그 조치를 한 당사자 사이에서만 효력이 있어서(민법 제169조), 어머니와 누나가 가만히 있으면 두 사람 몫의 시효는 계속 흐릅니다. 상속인들이 함께 소송을 내거나 몫을 한 사람에게 모아 청구하는 방법이 그래서 쓰입니다.
상대방이 당장 갚을 형편이 아니어도 판결은 남겨 둘 가치가 있습니다. 판결로 확정된 채권은 원래 시효가 5년이었더라도 10년이 됩니다(민법 제165조 제1항). 확정된 지급명령도 판결과 같은 효력이 있어 마찬가지입니다. 10년이 다 되어 가면 시효를 잇기 위해 소송을 다시 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상속 방식을 먼저 정하고, 내 몫만큼 청구하되, 빌려준 사실과 시효를 기록으로 챙기는 순서입니다.
그 메모를 들고 움직이기 전에 확인할 날이 하나 있습니다. 상속을 받을지 정하는 3개월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사실과 자신이 상속인이 된 사실을 안 날을 기준으로 셉니다. 그날부터 석 달 뒤를 달력에 먼저 적어 두십시오.
041-568-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