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동안 운영한 내과의원을 같은 자리에서 후배 원장에게 넘기기로 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양수 측이 보낸 계약서 초안에는 의료장비, 인테리어와 나란히 'EMR 및 환자 데이터 일체'가 양도 목록에 올라 있습니다. 이 한 줄은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운영하던 의원을 다른 원장에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기존 환자 진료기록을 새 원장에게 그대로 넘겨도 되나요?
새 원장은 법적으로 환자가 아닌 다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기존 진료기록은 환자가 동의한 건만 넘어가고, 나머지는 기존 원장이 직접 보관하거나 보건소로 보냅니다.
01 간판과 자리가 그대로인데 왜 다른 병원이 될까
판단 기준은 개설자가 바뀌느냐 하나입니다. 의원은 의사 개인이 시장·군수·구청장에게 개설 신고를 하고 문을 엽니다(의료법 제33조 제3항). 의료법에는 이 개설자 지위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는 규정이 없습니다.
그래서 의원 양도양수는 법적으로 두 절차가 겹친 것입니다. 기존 원장이 폐업 신고를 하고, 새 원장이 같은 주소에서 새로 개설 신고를 합니다. 두 신고를 같은 날 처리하면 진료 공백이 없으니 환자 눈에는 달라진 게 없죠.
간판이 같아도 법은 두 곳을 남남으로 봅니다.
의원 양도양수는 폐업과 새 개설이 겹친 것입니다. 새 원장은 법적으로 다른 사람이라, 진료기록은 환자 동의 없이 넘길 수 없습니다.
이 구조에 의료법 제21조 제2항이 적용됩니다. 의료인과 의료기관 종사자는 환자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환자에 관한 기록을 보여 주거나 사본을 내주어서는 안 되고, 새 원장도 여기서 말하는 다른 사람입니다. 위반하면 같은 법 제88조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 대상이 됩니다. 처벌 조항은 기록을 내준 사람을 겨누므로, 위험은 먼저 넘기는 원장에게 돌아옵니다.
02 개인정보 보호법대로 미리 알리기만 하면 안 될까
알리기만 해서는 부족합니다. 진료기록에는 의료법이 먼저 적용되고, 의료법은 통지가 아니라 환자의 동의를 요구합니다.
두 법의 차이는 이렇게 정리됩니다. 개인정보 보호법 제27조는 영업양도로 개인정보를 옮길 때 세 가지를 정보주체에게 미리 알리게 합니다. 옮긴다는 사실, 받는 사람의 연락처, 원하지 않을 때의 방법입니다.
의료법 제21조의2 제1항은 다른 의료기관이 진료기록 사본을 요청하면 환자나 보호자의 동의를 받아 응하게 합니다. 앞의 것은 알리면 기록이 움직이는 구조이고, 뒤의 것은 환자가 먼저 승낙해야 움직이는 구조입니다.
개인정보 보호법 제6조는 다른 법률에 특별한 규정이 있으면 그 법을 따르게 합니다. 진료기록의 열람과 송부는 의료법이 따로 정해 두었습니다. 따라서 영업양도 통지만으로 의료법의 동의 요건을 건너뛸 수는 없습니다. 건강에 관한 정보는 개인정보 보호법에서도 민감정보(제23조)로 분류되어, 어느 법으로 보아도 문턱이 낮지 않습니다.
여기서 흔한 오해가 생깁니다. 폐업 안내 문자를 보낸 뒤 반대 연락이 없으면 동의한 것으로 보는 방식인데, 답이 없다는 사실을 의료법상 동의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문자 수천 통을 보낸 기록은 통지의 증거일 뿐 동의의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03 폐업 신고 때 기존 기록은 어디에 남길까
선택지는 둘입니다. 의료법 제40조의2는 폐업 신고를 할 때 진료기록부 등을 관할 보건소장에게 넘기게 합니다. 다만 보관계획서를 내 보건소장의 허가를 받으면 개설자가 직접 보관할 수 있습니다.
보건소는 폐업 신고를 받으면서 기록을 어느 쪽으로 처리할지 함께 확인합니다. 양도양수라면 직접 보관 쪽이 쓰기 편합니다. 새 의원에서 동의서를 받은 환자의 사본을 기존 원장이 곧바로 보낼 수 있거든요. 보건소에 넘기면 환자는 보관 기관에서 사본을 받게 되고, 새 원장이 기존 원장에게 바로 요청하는 길은 사라집니다.
직접 보관한다면 보관 장소부터 실제로 떼어 놓아야 합니다. 기록을 의원 안 창고나 원래 서버에 그대로 두면 새 원장 쪽 직원이 언제든 열어 볼 수 있습니다. 보관계획서에 적는 장소는 기존 원장만 접근할 수 있는 곳이어야 서류와 실제가 맞습니다.
보관 의무는 폐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의료법 시행규칙 제15조가 정한 보존기간은 진료기록부 10년, 환자 명부 5년, 처방전 2년입니다. 직접 보관하는 원장은 이 기간 내내 환자 본인의 열람과 사본 요청에도 응해야 합니다.
04 새 원장은 어떤 길로 예전 차트를 받아 볼까
길은 환자 한 명씩, 동의를 거쳐 열립니다. 환자가 새 의원에 처음 오면 그 자리에서 기존 기록 송부에 대한 동의를 받고, 새 원장이 기존 원장에게 사본을 요청합니다. 환자가 기존 원장에게서 본인 기록 사본을 받아 직접 가져오는 방법도 있습니다(의료법 제21조 제1항).
그렇다면 접수 때 받아 둔 개인정보 동의서로 대신할 수는 없을까. 그 동의는 대개 기존 의원이 진료를 위해 정보를 쓰는 데 대한 것입니다. 다른 원장의 의원으로 기록을 보내는 일까지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누가 어느 의료기관으로 어떤 기록을 보내는지 적힌 동의서를 새로 받아야 나중에 다툴 여지가 남지 않습니다.
개원 전에 예전 환자 명단으로 동의를 받으려고 연락을 돌리는 일은 서두르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새 원장 쪽이 연락하면 명단을 미리 넘겨받았다는 뜻이 됩니다. 기존 원장이 연락하더라도 상대는 대부분 다시 올지 알 수 없는 환자들입니다. 기록이 따로 보관되고 송부 절차가 정해져 있다면, 다시 찾아온 환자에게 그날 동의를 받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번거로워 보여도, 이 경로에서는 누구도 처벌 조항에 걸릴 일이 없습니다.
기존 기록은 기존 원장이 보관하거나 보건소로 보내고, 다시 찾아온 환자에게 동의를 받아 한 건씩 보냅니다.
05 계약서 초안부터 개원일까지 무엇을 정해 둘까
정할 일은 계약서의 그 한 줄에서 시작합니다. 'EMR 및 환자 데이터 일체'를 양도 목록에서 지우고, 동의한 환자의 기록을 기존 원장이 송부한다는 협조 조항으로 바꿉니다.
권리금을 두고 양수 측과 숫자를 맞춰 가는 중이라면, 그 금액에는 기존 환자 수가 들어가 있을 겁니다. 양수 측은 환자 데이터를 넘겨받는 것을 전제로 값을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요, 환자가 많다는 사실을 값에 반영하는 일과 기록 자체를 넘기는 일은 별개입니다. 앞의 것은 두 사람이 흥정할 문제이고, 뒤의 것은 의료법이 막아 둔 일입니다.
1) 계약 단계: 양도 목록에서 환자 기록을 빼고, 보관 주체와 송부 방식, 협조 기간을 조항으로 둡니다.
2) 폐업 전: 의원 안에 폐업 사실, 기록 보관처, 사본 받는 방법을 게시합니다. 의료법은 폐업하는 개설자에게 환자의 권익을 보호하는 조치를 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3) EMR 분리: 업체에 기존 데이터를 기존 원장 보관본으로 떼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새 의원은 빈 데이터베이스로 시작합니다.
4) 신고일에는 폐업 신고와 보관계획서 제출, 새 원장의 개설 신고를 하루에 맞춥니다.
5) 개원 뒤로는 동의서를 낸 환자 것만 건별로 보냅니다.
이 일정에서 가장 오래 이어지는 것은 5번입니다. 협조 기간과 연락 방법을 정해 두지 않으면, 몇 년 뒤 환자가 동의서를 내도 새 원장이 사본을 요청할 곳을 찾지 못합니다. 기존 원장이 이사하거나 은퇴한 뒤에도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조항에 함께 적습니다.
흔히 건너뛰는 것은 3번입니다. 같은 EMR 프로그램과 계정을 그대로 이어 쓰면, 계약서에 무엇을 적었든 기록을 통째로 넘긴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남아서 일하는 직원이 예전 차트를 조회해도 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06 개설자가 바뀌지 않으면 무엇이 다를까
개설자가 그대로면 기록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의료법인이 개설한 의원에서 이사장이 바뀌거나, 개인 의원에서 진료하는 봉직의만 바뀌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기록은 같은 의료기관 안에 머물고, 새로 온 의사는 그 기관의 진료를 위해 기록을 봅니다.
이 차이를 보고, 개설 명의는 기존 원장 앞으로 둔 채 새 원장이 운영하는 방법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잔금을 치르기 전까지만 그렇게 하자는 제안도 나오고요. 그러나 의료법 제4조 제2항은 의료인이 다른 의료인의 명의로 의료기관을 운영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진료기록 문제를 피하려다 개설 자체가 문제 되는 상황으로 옮겨 가는 셈입니다.
위 설명은 개인 의원의 원장이 바뀌는 경우를 전제로 합니다. 두 원장이 이미 그 의원을 공동으로 개설한 사이였다면 따져 볼 출발점이 달라집니다. 양수인이 의료법인이어도 개설자가 바뀐다는 점은 같으므로 이 글의 설명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정리하면, 계약서 양도 목록에서 환자 기록을 빼고 기존 원장의 보관과 동의한 환자 기록의 송부를 조항으로 정하세요. EMR도 실제로 분리해야 합니다.
계약서 초안의 양도 목록에 'EMR'이나 '환자 데이터'라는 낱말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이 거래는 제21조 제2항이 막는 방향으로 짜여 있습니다. 그 줄이 기존 원장의 보관과 동의한 환자 기록의 송부를 약속하는 문장으로 바뀌어 있다면, 거래는 이미 환자 한 명씩 동의를 받는 길로 들어와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는 양수 측이 보낸 초안의 그 한 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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