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를 치르고 부모님 통장을 정리하러 은행에 갔는데, 잔고가 이미 비어 있었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돈을 뺀 사람이 형제 중 한 명이라는 걸 알게 되면 마음이 더 복잡해지죠.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 날, 형이 아버지 통장에서 돈을 먼저 빼 갔습니다. 상속을 나눌 때 돌려받을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형제가 뺀 예금은 그 형제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예금은 돌아가신 순간 법이 정한 비율대로 상속인들에게 나뉘기 때문에, 자기 몫보다 더 가져간 돈은 다른 형제에게 돌려줘야 하는 돈입니다.
다만 돌려받는 길은 집이나 땅을 나누는 절차와 다를 때가 많습니다. 언제 뺐는지, 어디에 썼는지, 예금 말고 남은 재산이 있는지에 따라 계산도 절차도 달라집니다.
01 예금은 사망하는 순간 나뉩니다
예금은 상속인들이 따로 나누기로 합의하지 않아도, 돌아가시는 순간 자동으로 나뉩니다. 법원은 예금처럼 금액으로 쪼갤 수 있는 권리를 '가분채권'이라고 부르고, 상속이 시작되면 법정상속분대로 각 상속인에게 당연히 나뉜다고 봅니다. 그래서 예금은 원칙적으로 가정법원의 상속재산분할 심판 대상에서 빠집니다.
법정상속분은 민법 제1009조가 정합니다. 같은 순위의 상속인은 똑같이 나누고, 배우자는 자녀 한 사람 몫에 5할을 더 받습니다. 자녀끼리는 장남이든 출가한 딸이든 몫이 같습니다.
숫자로 보면 더 분명합니다.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셨고, 자녀 셋을 둔 아버지가 예금 9,000만 원을 남기고 돌아가셨다고 해 볼게요. 장례 기간에 첫째가 아버지 계좌에서 9,000만 원을 모두 찾아갔다면, 셋이 3,000만 원씩 나눠 가졌어야 할 예금 중 6,000만 원을 첫째가 더 가져간 셈입니다.
그래서 둘째와 셋째는 각자 3,000만 원을 돌려 달라고 청구할 수 있습니다. 계산 자체는 이렇게 단순합니다.
예금은 돌아가신 순간 법정상속분대로 나뉩니다. 내 몫보다 더 가져간 돈은, 나머지 상속인에게 돌려줘야 할 돈입니다.
02 돌아가시기 전에 뺀 돈 vs 돌아가신 뒤에 뺀 돈
같은 통장에서 빠져나간 돈이라도, 언제 빠졌느냐에 따라 성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돌아가신 뒤에 뺀 돈은 이미 상속인들에게 나뉜 예금을 한 사람이 가져간 것이지만, 돌아가시기 전에 뺀 돈은 그때까지는 부모님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돌아가시기 전 인출을 두고 다툼이 길어지는 건, 통장만 봐서는 부모님 뜻이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출 당시 부모님의 건강 상태, 창구에서 찾았는지 현금인출기였는지, 돈이 누구 계좌로 옮겨 갔는지를 함께 봅니다. 치매 진단 뒤에 큰돈이 빠졌다면 '부모님이 주셨다'는 설명은 힘을 잃기 쉽습니다.
돌아가신 당일에 인출됐다면 시각까지 맞춰 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사망진단서의 사망 시각과 거래내역의 거래 시각을 나란히 놓으면, 어느 쪽 규칙이 적용될지 드러납니다.
03 돌려받는 청구는 민사소송으로
돌아가신 뒤 인출된 예금을 돌려받는 청구는, 가정법원의 상속재산분할 심판이 아니라 민사소송으로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남의 몫을 법률상 원인 없이 가져갔으니 부당이득반환(민법 제741조)을, 일부러 빼 갔다면 불법행위 손해배상(민법 제750조)을 근거로 합니다. 어느 쪽이든 청구 금액의 출발점은 내 법정상속분입니다.
부모님 명의 아파트나 땅이 함께 남아 있다면 절차가 둘로 나뉠 수 있습니다. 부동산은 가정법원에서 상속재산분할로, 인출된 예금은 민사법원에서 반환 청구로 다루는 식이죠. 이 구분을 모른 채 분할심판에만 예금 문제를 올리면, 그 부분은 판단에서 빠질 수 있습니다.
같은 가족 일을 두 법원에서 다룬다니 번거롭게 들리실 겁니다. 고소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는 분도 많은데, 형사 고소는 처벌을 구하는 절차라서 내 몫을 계산해 돌려받는 일은 결국 민사나 가사 절차에서 해야 합니다.
지금 형제에게 보낼 메시지를 몇 번이고 고쳐 쓰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메시지에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돈을 언제 얼마나 뺐고 어디에 썼는지입니다. 상대가 내놓는 사용처에 따라 청구할 금액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04 "장례비·병원비로 썼다"는 해명
형제가 가장 먼저 내놓는 답은 대개 장례비와 병원비로 썼다는 말입니다. 이 해명은 근거가 있으면 받아들여집니다. 민법 제998조의2는 상속에 관한 비용을 상속재산에서 내도록 정하고 있고, 법원은 고인의 사회적 지위와 지역 풍속에 비추어 합리적인 범위의 장례비를 이 비용으로 봅니다.
앞의 예에서 첫째가 장례비 900만 원을 냈다면 나눌 예금은 8,100만 원이 되고, 한 사람 몫은 2,700만 원으로 줄어듭니다. 둘째와 셋째가 청구할 금액도 각 2,700만 원이 됩니다. 아버지가 남긴 병원비 미납금을 이 돈으로 갚았다면, 그 금액도 같은 방식으로 빠집니다.
그렇다고 쓴 돈을 영수증 없이 다 빼 주지는 않습니다. 법원은 부의금을 장례비에 먼저 쓰라고 건넨 돈으로 봅니다. 부의금으로 장례를 치르고도 남았다면, 예금에서 장례비를 또 빼야 할 근거는 약해지죠.
"부모님을 모시고 산 내가 더 가져가는 게 맞다"는 말도 자주 나옵니다. 부모님을 특별히 부양했거나 재산을 늘리는 데 보탠 상속인에게 더 얹어 주는 몫을 기여분(민법 제1008조의2)이라고 하는데, 이는 상속인끼리 합의하거나 가정법원이 정해야 생깁니다. 돈을 먼저 가져간 사람이 스스로 셈해 넣을 수는 없습니다. 생전에 "이 돈은 네가 가져라" 하셨다는 말도, 뒷받침할 자료가 있느냐가 무게를 정합니다.
05 한 번에 정산할 수 있는 경우
예금이 언제나 분할심판 밖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 생전에 큰 증여를 받았거나 기여분이 다퉈지는 사건처럼, 예금을 빼고 나누면 공평이 깨질 때는 법원이 예금도 분할 대상에 넣을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돌아가신 뒤 이미 인출된 돈을 여기에 어떻게 반영할지는 사건마다 판단이 달라서, 민사 청구를 따로 낼지 함께 따져 봐야 합니다.
가장 간단한 정리는 협의입니다. 공동상속인은 언제든 협의로 상속재산을 나눌 수 있고(민법 제1013조 제1항), 이 자리에서는 형제가 먼저 가져간 돈을 그 몫에서 미리 받은 것으로 치고 부동산을 나눠도 됩니다. 협의는 상속인 전원이 참여해야 효력이 있습니다.
반환 판결을 받아도 그 형제 명의 재산이 없으면 실제로 돌려받기는 어렵습니다. 부모님 명의 부동산이 남아 있다면 그 형제의 상속지분이 사실상 정산의 재원이 되기 때문에, 소송을 내기 전에 그 지분에 가압류를 걸어 둘 수 있는지부터 검토하게 됩니다.
위 계산은 유언이 없고 상속인 모두가 상속을 받는다는 전제입니다. 유언장이 있거나, 누군가 상속을 포기했거나, 부모님께 재산보다 빚이 많았다면 출발점이 달라집니다.
상속재산을 처분한 상속인은 빚까지 물려받는 단순승인을 한 것으로 봅니다(민법 제1026조 제1호). 예금을 빼서 쓴 형제는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이 막힐 수 있습니다.
06 거래내역 확인부터 소송까지, 순서
정리는 날짜를 확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1. 고인 계좌의 거래내역을 뗍니다. 상속인이라면 혼자서도 발급받을 수 있고, 계좌가 어디 있었는지 모르면 금융감독원 상속인 금융거래조회부터 신청합니다. 결과가 오기까지 몇 주가 걸립니다.
2. 사망 시각을 기준으로 인출을 전과 후로 나누고, 형제에게 사용처와 영수증을 요청합니다.
3. 금액을 맞춰 협의합니다. 정산액을 적지 않은 상속재산분할협의서에 먼저 도장을 찍는 일이 가장 흔한 실수입니다.
4. 협의가 깨지면 예금은 민사소송, 부동산은 가정법원 분할심판으로 갑니다. 민사 1심은 반년에서 1년 남짓, 감정이 필요한 분할심판은 1년을 넘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은 잔액을 다른 형제가 맞서 빼는 것도 같은 문제를 하나 더 만들 뿐입니다. 상속재산분할 청구에는 정해진 기한이 없지만, 인출된 돈을 돌려 달라는 민사 청구에는 시효가 있고, 청구를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 기간을 세는 방식도 다릅니다.
정리하면, 돌아가신 뒤 뺀 돈은 돌려받을 돈이고, 돌아가시기 전에 빠진 돈은 부모님 뜻이었는지에 따라 정산 방법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정리는 언제나 인출 날짜를 확인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통장 사본을 아직 떼지 못하셨어도 상담은 시작할 수 있습니다. 첫 통화에서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날과 형제가 돈을 뺀 때가 그 앞인지 뒤인지, 그리고 예금 말고 집이나 땅이 남아 있는지를 여쭙니다. 기억나는 대로 말씀하시면 되고, 어느 은행 내역을 어디까지 떼야 할지는 이야기를 들은 뒤에 함께 정하겠습니다.
062-223-78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