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수창구에 손해보험사 조사역이 찾아와 환자 이름과 청구 건 번호를 대며 "이 환자분 진료기록 일체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병의원에서 드물지 않게 벌어집니다. 담당 직원은 보험사가 요구하니 당연히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환자가 서명한 동의의 범위와 개인정보를 제3자에게 넘길 법적 근거가 있는지에 따라 응대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 두 가지를 확인하지 않고 자료부터 내주면, 정작 문제가 되는 쪽은 보험사가 아니라 병원입니다.
보험사 직원이 방문하면 병원은 응할 의무가 있을까
원칙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의료인이나 의료기관 종사자는 환자가 아닌 사람에게 진료기록을 열람하게 하거나 사본을 내줄 수 없다는 것이 의료법 제21조 제1항의 내용입니다. 환자 본인, 배우자나 직계존비속 등 법이 정한 사람, 환자가 지정한 대리인이 아니라면 병원은 원래 진료기록을 내줄 권한이 없습니다. 손해보험사 직원은 이 예외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방문했다는 사실만으로 자료를 내줄 이유는 없습니다. 지금 접수대에서 요청서를 받아 든 담당자라면, 상대가 누구인지보다 먼저 무엇을 근거로 요청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동의서를 가져왔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실손보험금을 청구할 때 환자는 대개 개인정보 수집·이용·제공 동의서에 서명합니다. 이 동의서는 개인정보보호법 제15조(수집·이용)와 제17조(제3자 제공)에 따라 효력을 가지는데, 여기서 병원이 확인할 것은 서명 여부가 아니라 동의서에 적힌 목적·항목·기간입니다. 대부분의 동의서는 해당 보험금 청구와 관련된 질병과 그 진료 기간에 한정되어 있고, 청구와 무관한 과거 병력이나 정신건강의학과 상담 기록까지 포함한다고 명시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환자가 이미 서명했으니 다 보여줘도 되는 것 아니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동의는 서명 여부가 아니라 범위의 문제입니다. 이번 청구와 관계없는 자료까지 요구한다면 그 부분은 동의의 효력 밖에 있습니다.
동의서 없이 '조사'라고만 말하는 경우는 어떻게 다른가
동의서 없이 방문한 조사역은 수사기관이 아니라는 점에서 성격이 다릅니다. 실손보험사의 특별조사팀(SIU) 직원은 보험사기 의심 건을 자체적으로 확인하는 인력이고, 압수수색영장이나 법원의 문서제출명령 같은 강제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흔히 "환자가 이미 구두로 동의했다"거나 "보험금 지급 심사에 필요하다"는 말로 협조를 구하는데, 구두 동의나 심사 필요성만으로는 개인정보 제공의 법적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서면 위임장이나 동의서 원본 또는 사본을 요구하고, 그것이 없다면 그 자리에서 자료를 내줄 이유가 없습니다.
범위를 넘는 요구를 받으면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하면 될까
판단이 애매하면 서두르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동의서 문구가 포괄적으로 적혀 있어 이번 요구가 범위 안인지 밖인지 바로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자료를 내주는 대신 며칠 시간을 두고 환자에게 직접 연락해 추가 확인을 받거나 병원 내부에서 검토한 뒤 회신하는 쪽이 안전합니다. 한번 넘긴 자료는 되돌릴 수 없지만, 며칠 늦게 회신하는 데는 특별한 불이익이 없습니다. 실무적으로는 아래 세 단계로 정리하면 충분합니다.
보험사가 재촉하더라도 이 확인 절차를 건너뛸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심평원이나 수사기관의 요청과는 무엇이 다른가
같은 '자료 요청'이라도 요청 주체에 따라 근거가 다릅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나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요양급여 적정성을 확인하기 위해 자료를 요구하는 경우는 국민건강보험 관련 법령에 따른 고유 권한에 근거하므로, 손해보험사의 임의 요청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수사기관이 법원에서 발부받은 압수수색영장을 제시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때는 병원이 영장 범위 내에서 협조할 의무가 있습니다. 반면 손해보험사 직원의 방문은 환자와 보험사 사이의 사적 계약 관계에서 나오는 요청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요청서에 찍힌 직인이나 방문자의 신분증만 보고 같은 무게로 응대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범위를 넘겨 제공하면 병원에 어떤 책임이 남을까
동의 범위를 넘어 자료를 내준 뒤에 남는 것은 병원의 책임입니다. 의료법 제21조를 위반해 제3자에게 진료기록을 열람하게 하거나 사본을 내주면 의료법 제88조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 대상이 될 수 있고, 별도로 개설 자격이나 면허에 관한 행정처분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개인정보보호법 제17조를 위반해 동의 없이 제3자에게 개인정보를 제공한 경우에는 제71조에 따라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이 적용될 수 있고, 환자는 병원을 상대로 개인정보보호위원회에 신고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자료를 내준 쪽은 병원이지만, 남는 불이익도 병원 몫이라는 점이 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방금 이런 요청서를 받아 두었다면, 확인해야 할 기한은 보험사가 정한 회신 마감일이 아닙니다. 동의서에 적힌 서명일을 기준으로, 그 동의가 지금 요구받은 항목과 기간을 실제로 포괄하고 있는지부터 짚어보는 것이 먼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