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 책상에 'AI 독자'가 앉았다: 변호사 준비서면이 요약당하는 시대
소장·답변서·준비서면을 AI가 요약한 사건이 이미 선고됐습니다. 법원은 자체 AI 플랫폼을, 대법원은 103억 규모 양형 AI를 짓고 있습니다. 변호사의 서면은 이제 사람보다 기계에게 먼저 읽힙니다.
올해 6월 25일, 특허법원 특허5부가 사건 하나를 선고했습니다. 결론보다 과정이 특별했습니다. 소장과 답변서, 준비서면의 요약·정리에 생성형 AI가 동원됐고, 외국어 선행기술자료 번역에도 AI가 붙었습니다. 양측 당사자가 AI 활용에 동의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재판부는 올해 4월 특허법원 특허2부와 특허5부에 도입된 'AI 활용 시범재판부'입니다. 9~10월까지 시범 운영됩니다. 즉, 지금 이 순간에도 어느 변호사가 밤새 다듬은 준비서면은 재판부의 눈이 아니라 AI의 요약을 거쳐 먼저 읽히고 있습니다.
법원은 이미 '자기 AI'를 지었습니다
올해 2월,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사법부 자체 AI 플랫폼을 구축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재판지원 AI 시스템'을 시범 오픈했습니다. 사법부가 독자적인 생성형 AI 인프라를 마련한 첫 사례입니다.
시범 오픈된 것은 4단계 사업 중 1단계, '법률 정보 지능형 검색 및 리서치'입니다. 법률 쟁점을 질의하면 유사도 높은 판례와 법령, 문헌을 종합해 요약 답변을 내놓습니다. 화면 한쪽에는 참고 자료 목록이 붙고, 원문보기로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활용 자료는 전산에 입력된 대법원 판례와 2013년 이후 판결문 전체, 여기에 법령·대법원규칙·결정례·유권해석·실무제요·주석서까지 포함됩니다. 앞으로 선고되는 판결문도 내부 시스템에 등록되는 즉시 끌어와 씁니다.
중요한 건 다음 단계입니다. 법원은 AI가 소장·준비서면·답변서를 분석해 사건의 요지와 쟁점을 정리하는 2단계 시스템을 이르면 연내 개발 목표로 잡았습니다. 더 나아가 판결문 초안의 논리 오류나 비문까지 점검하는 구상도 나와 있습니다. 소장 접수부터 판결문 완성까지, 재판의 전 과정에 AI를 얹겠다는 뜻입니다.
법원행정처는 올해 1월 사법부 AI 정책을 전담하는 '사법인공지능심의관' 보직을 신설했고, 2월에는 '법관을 위한 AI 가이드북'을 발간했습니다. 환각·데이터 편향·개인정보 침해 같은 위험 기준과 함께 프롬프트 작성 원칙까지 담겼습니다. 조직과 매뉴얼이 동시에 만들어졌다는 건, 실험이 아니라 제도로 가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103억, 그리고 2028년
대법원은 '사법부 AI 기반 형사재판 및 양형지원을 위한 지능형 플랫폼 구축 사업'에 103억 원을 배정했습니다. 올해 9월 개발에 착수해 2028년부터 전국 형사재판에 투입한다는 계획입니다. 판결문에서 양형인자를 추출·추천하고, 유사 판결문을 검색·요약하며, 양형 이유 초안 작성까지 지원합니다. 법원 내부 데이터로 양형 특화 LLM을 따로 만들고, RAG로 답변의 근거와 출처를 함께 제시해 환각을 줄이겠다는 설계입니다. 외부 리걸테크가 제공하는 AI로는 부족하다고 보고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방향도 분명히 했습니다.
배경에는 숫자가 있습니다. 1심 형사합의부 사건은 2020년 1만5050건에서 2025년 2만5922건으로 5년 새 72% 늘었습니다. 같은 기간 평균 처리 기간은 176.5일에서 206.5일로 길어졌습니다. 양형기준 대상 범죄는 7개에서 48개로 확대됐습니다. 사건은 불어나고 처리 시간은 늘어나는데 사람은 그대로입니다. 이 상태에서 AI를 쓰지 않는 선택지는 사실상 없습니다.
법원만이 아닙니다. 대검찰청도 형사사법정보시스템 AI 모델 개발을 위한 정보화전략계획 용역을 발주하며 내부망 방식의 생성형 AI 구축에 무게를 싣고 있습니다. 후보 과제에는 RAG 기반 법률 검색, 대용량 기록 요약과 쟁점 추출, 공소장·보고서 초안 작성이 들어 있습니다. 재판부도, 수사기관도 기록을 '요약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요약을 통과하는 서면과, 요약에서 지워지는 서면
여기서 변호사에게 실질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서면의 승부처가 바뀝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읽던 시절에는, 뒤쪽에 묻어둔 결정적 한 문단도 언젠가는 발견됐습니다. AI 요약이 1차 필터로 들어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요약 모델은 문서 구조를 신뢰합니다. 앞머리에 놓인 문장, 소제목으로 명시된 쟁점, 사실과 증거가 1:1로 연결된 문단이 살아남습니다. 반대로 서사에 녹여 흘린 주장, 각주 속에 숨긴 반박, 20페이지째에 등장하는 결정적 사실관계는 요약 단계에서 무게를 잃습니다.
실무적으로 손볼 지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서면 첫머리에 쟁점과 결론을 문장으로 못 박습니다. '피고의 주장은 X이나, Y라는 사실에 비추어 성립하지 않는다'처럼 요약 가능한 형태여야 합니다. 둘째, 사실·증거·법리를 표나 항목으로 분리해 기계가 관계를 놓치지 않게 만듭니다. 셋째, 인용 판례는 사건번호와 판시사항을 정확히 병기합니다. 대법원과 대검찰청, 대한변호사협회가 모두 AI 오류 방지를 위한 규칙 개정과 가이드라인 제정에 나선 상황에서, 검증되지 않은 인용은 사건이 아니라 변호사 자신을 위험에 빠뜨립니다.
한 가지 더. 법원의 재판지원 AI는 2013년 이후 판결문 전체를 재료로 씁니다. 재판부가 유사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즉시 확인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상대방보다 유사 판결의 흐름을 정확히 짚어내는 쪽이 협상과 변론 모두에서 유리해집니다.
같은 일이 의뢰인 쪽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재판부가 AI로 서면을 요약해 읽는 것과, 의뢰인이 AI에게 "이런 사건은 어느 변호사에게 가야 하나"라고 묻는 것은 같은 현상의 앞뒤입니다. 긴 문서를 사람이 통독하지 않는 시대가 법원 안에서도, 법원 밖에서도 동시에 열렸습니다.
그래서 변호사가 쓰는 모든 글은 두 명의 독자를 상정해야 합니다. 최종 판단을 내리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에게 먼저 요약을 건네는 기계. 준비서면의 첫 문단을 명료하게 다듬는 습관은 홈페이지 상담 페이지의 첫 문단, 블로그 글의 소제목, 사건 분야 소개문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구조가 없는 글은 요약되지 않고, 요약되지 않는 글은 선택지에 오르지 못합니다.
특허법원의 시범 운영은 가을에 끝납니다. 양형 AI 개발은 다음 달 시작됩니다. 준비 기간은 이미 짧습니다.
Written by
macdee 에디터
MAKETHIS1 편집팀이 작성하는 법률 마케팅 인사이트입니다. 기자·방송작가 출신이 쓰고, 법학 전공자가 법률 표현을 검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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